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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제목 | 오기수 회장 [세종 공법] 책 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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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조회수 | 4992 | ㆍ 등록일시 | 2016-03-16 14:4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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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하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지 못한다. 공법에 대한 동의어가 여러 가지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세종대왕이 만든 공법(貢法)이라 하면 아주 적은 사람들이 이해한다. 그리고 전분6등법·연분9등법 하면 그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고작해야 “세종 때에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6등법으로 나누고,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연분9등법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조세제도” 정도이다.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이 공법의 일부인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세종대왕이 제정한 공법에 대한 역사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법은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하여 일생 혼신을 다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든 업적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즉위할 때부터 약 25년 동안, 그리고 대신들과 17년 동안 ‘부정부패 없는 간편하고 공평한 세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직접 조정에서 논의했으며, 백성들에게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지역별로 시험하여 세종 26년(1444)에 최종적으로 공법을 제정했다. 세종대왕은 오로지 백성을 위한 선진적이고 과학적인 공법을 만들고, 조세 징수를 법에 따라 하도록 함으로써 조세 법치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조선 최고의 왕이다. 세종대왕은 세금 때문에 고통을 받는 백성들이 한 명도 없도록 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다. 이는 세종대왕이 재위 28년에 한 다음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답험손실법이 사정에 따라 경하게 하고 중하게 하여, 말류(末流)의폐단이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이 법(공법)을 행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만일 곧 잊어버려서 덮어두고, 하지 않으면 나의 병든 몸에도 좋겠다. 다만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몸이 수고로움을 당하여 편안한 것을 뒷사람에게 물려주라.’ 했으니, 이것이내가 잊지 못하는 것이다. _《세종실록》 28년 6월 18일 세종대왕이 말년에 병든 몸을 이끌면서도 ‘내 몸이 수고로움을 당하여 편안한 세법인 공법을 백성에게 물려주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말씀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공법의 가치가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세종대왕이 이룩한 훌륭한 업적이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너무도 많기 때문에 공법 정도는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세종대왕이 제정한 공법은 그 당시의 백성에게 훈민정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후 공법은 세조 6년(1460)에 편찬된 《경국대전》의 호전에 수록되어 조선왕조의 근간 세법이 되었다. 성종 3년(1472)에 호조는 공법이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공법은 행해진 지가 이미 오래 되었고 《대전》에도 실려 있어서, 이제 다시 손실(損實)을 행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_《성종실록》 3년 8월 4일 여기서 《대전》이란 《경국대전》을 말하며, ‘손실’이란 태조 이성계가 조세 문란을 타파하기 위해 고려 말부터 시행하여 건국 후에도 계속 실시한 답험손실법을 말한다. 세종대왕은 공법을 시행하면서 그 답험손실법을 폐지했다. 성종 5년에 원상 조석문은 다음과 같이 공법은 세종대왕이 만든 것으로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요체로 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기고 있어 영원히 시행할 법이라고 했다. 공법 속에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세종께서 이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공법을 작정하시어, 전분6등과 연분9등으로 하여 먼저 하삼도의 전지를 헤아려 공법으로 거두었는데, 백성이 다 편리하게 여겼고, 다른 도의 백성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참으로 만세토록 지켜서 시행해야 할 법이니, 가벼이 고칠수 없습니다. _《성종실록》 5년 7월 24일 공법이 만세토록 지켜서 시행해야 할 법이 된 것이다. 공법은 제정된 후 16년 만에 세조가 편찬한 《경국대전》의 호전에 수록되었고, 그 핵심인 전분6등법은 조선 말까지 약 450년간 시행되었으며, 연분9등법은 영정법(인조 13, 1635년)이 실시되기 전까지 약 190년간 시행되었다. 공법이 조선시대 근본 세법임을 말하는 것이다. 《경국대전》이 조선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최고의 법전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경국대전》에 규정된 공법 역시 조선 최고의 세법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공법’이란 단어가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조세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세종 공법’은 조선의 조세 선진화와 과학화를 실현한 최고의 세법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조세 혁신이자 유산이다. 뿐만 아니라 공법은 세계 조세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우리의 역사적인 제도 중 세계화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공법은 대동법과 견줄 수 없는 조세 혁신이라 생각한다. ‘세종 공법’의 문화유산을 세계화하기 바라며 이 책은 이러한 공법의 제정과 시행 과정, 그리고 그 역사적 가치를 자세히 분석하고 설명하여 널리 알리고자 한다. 이는 세계적인 공법이 세상에서 빛나도록 하는 작은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 공법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공법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민주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공법의 과학화와 선진화를 통하여 조선을 조세의 행복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세종대왕은 부익부 빈익빈 하지 않는 공평한 과세를 위하여 이전의 세법과는 완전히 다르게 과학적으로 전분6등법의 면적을 산정하고, 계량적으로 연분9등법의 세율을 정했다. 이에 백성들이 공법에 따라 정해진 세금만을 부담하게 함으로써 탐오한 양반 관리들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했다. 전분6등법은 우리나라 고유의 결부법을 근간으로 하여 비옥도에 따른 각 전답의 면적 크기를 과학적으로 산정하여 공평과세를 1차적으로 실현하고, 연분9등법은 매년 풍흉에 따른 계량적인 세율로 조세를 징수함으로써 2차적인 공평과세를 실현하였다. 전체적으로 전답의 조세 등급을 54단계로 세분하여 조세를 부담하도록 했다. 더구나 세종대왕은 이전까지 농부의 수지척(手指尺)을 사용하여 전답을 양전하게 한 제도를 폐지하고, 표준자인 주척을 기준하여 과학적으로 만든 양전척을 사용하게 했다. 따라서 그 당시 전세(田稅)를 징수하기 위하여 이렇게 과학적이고 계량적으로 만든 세법은 세상에 없었다. 조세제도를 도입한 중국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세법이다. 한마디로 공법의 전분6등법과 양전9등법은 그 당시 최고의 과학 수준을 활용하여, 조세 선진화와 과학화를 실현한 세계적인 세법이라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이러한 공법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적으로 만들었다. 공법에 대한 내용이 《세종실록》에 처음 기록된 때는 세종 9년에 실시된 중시(重試)의 과거시험 문제이다. 세종대왕은 세법의 개선책에 대한 질문을 책문에 출제했는데, 그 책문에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는 문제를 내었다. 공법에 대한 의지를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즉위하면서부터 공법으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자 했음을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 세종 21년에 한 말씀이다. 내가 공법을 행하고자 한 것이 이제 20여 년이고, 대신들과 모의(謀議)한 것도 이미 6년이었다. _《세종실록》 21년 5월 4일 세종대왕은 그만큼 오랫동안 공법을 시행하기 위하여 뜻을 두고 조정 대신들과 논의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10년에 조정에서 황희와공법을 처음 논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세종 21년에는 조정대신과 모의한 기간이 벌써 11년이 된 것이다. 세종대왕은 이렇게 많은 시간을 백성의 뜻에 따른 공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민주적인 방법으로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시험했다. 세종대왕은 재위 12년에 호조에서 올린 ‘1결 10말 공법’에 대한 찬반을 양반 관리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백성들까지 묻도록 했다. 공법에 대한 여론조사를 명한 것이다. 이에 호조는 무려 5개월에 걸쳐 이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찬성하는 자는 98,657명이었으며, 반대하는 자는 74,149명이었다. 총 172,806명에 대한 여론을 수렴한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그 당시의 인구가 692,477명이었으므로 4분의 1이 여론조사에 참여한 것이다. 그래서 이 공법에 대한 여론조사는 국민투표라 할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후에도 세종대왕은 “나는 경상·전라 양도의 인민들 가운데 공법의 시행을 희망하는 자가 3분의 2가 되면 우선 이를 양도에 시행하려니와, 3분의 2에 미달한다면 기어이 강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라고 하여, 공법의 시행을 백성의 뜻에 따르고자 함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왕권시대의 군주가 현대에서도 시행하기 어려운 3분의 2의 가중다수결로 세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이다. 민주적인 방법으로 공법을 제정하여 백성이 넉넉해지는 세법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한 바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기틀이 다져진 유럽에서도 그 당시에 이렇게 세법을 민주적으로 만든 나라는 없었다. 이처럼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공법은 세종 26년에 최종 제정되었다. 25년이 넘는 그 긴 시간동안 세종대왕은 밖으로는 자신들의 뜻을 전혀 표출할 수 없는 힘없는 백성들을 세법 제정에 참여시키고, 안으로는 정치의 주도 세력인 조정의 신료들을 아우르면서 공법을 완성했다. 이 어찌 ‘세종 공법’이 위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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